범신론 배우는즐거움

유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그 지성은 우선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영에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할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인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자는 신이 기도자에게 응답하지 않고 죄나 고백에 관심이 없으며, 우리 생각을 읽지 않고 변덕스러운 기적을 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유신론자와 다르다.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p.33

기껏 주일이면 교회에 빠지지 말자는 정도의 규범준수형 기독교인인 나 스스로를 위의 정의를 기준으로 분류해보니 이신론쪽에서 범신론쪽으로 기우는 와중에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이였고, 대학을 거치며 이 신은 우리가 이해해야 할 우주적 법칙을 만든 혹은 그 자체인 비초자연적인 신으로 여겨졌다. 사회에 나와서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저자들이 만들어내는 진화론 추종 입장의 세계관의 영향으로 더욱 범신론에 가까와지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이런 종교관은 자라면서 접하고 의지하게 되는 정보의 경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무신론은 역설적으로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어찌보면 범신론은 종교적으로 가장 무딘 입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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